내가 일찍이 인학사 빈(휘邠)의 한시(漢詩)가 아름답고 청신(清新)함이 이태백과 소동파 두 학사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옛말이 서문충시화(徐文忠詩話:즉 徐居正의 徐四佳 詩話를 듯함)에 있다고 하는 것을 들었으나 고증하여 한 번 보고자 하였으나 계제가 없었더니 요즘 학강고사(鶴岡故士)의 묘비명의 부탁을 받고 그의 선대 사적을 오게 되었다. 학사(學士公 : 휘邠)께서는 즉 고려의 문관으로 벼슬이 한림(翰林學士)에 이르렀고 초당유고(草堂遺稿:초당께서 남긴 시 원고)가 있었다. 한림(翰林學士 휘邠)께서 후손에 석성부원군 휘 당(璫)이 있었고 부원군께서 연성군(延城君 휘安)을 낳았으며 二대 내려와서 삼사좌윤 광국(光國)이요 三대째는 전농소윤(典農少尹:휘承祐)이매 이 분들은 먼 상계(上系)이시며 증조부에 이르러서는 휘는 문두(文斗)요 배위는 남원양씨(南原梁氏)였고 조부는 휘 구락(龜洛)이시니 배위는 창녕조씨(昌寧曺氏)요 아버지는 병규(휘 炳圭)이시니 배위(配位:부인의 뜻)는 도강김씨(道康金氏)로 단(壇)의 따님이었다. 공(公)의 이름은 동균(東均)이요 자(字)는 국찬(國贊)이시니 본관은 교동으로 철종 신유 十월 十五일에 나시었다. 어렸을 때에 심히 가난하여 공부를 할 수 없으매 부지런히 남쪽 밭에서 일하여 부모님을 공양(供養)하고 의복과 일상도구에 이르러서도 모두 갖춰드렸다. 三十九세에 이르러 비로소 분발(奮發)하여 말하기를 “눈이 어둡게 일생을 지내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다.”하고 글방(私塾)에 가서 사기(史記)를 배우고 점점 사서삼경(四書三經)에 들어가서 힘써서 마지않으매 五十七세에 이르러 문리(文理)를 통하게 되어 글을 만들매 능히 해박하였고 시(詩)를 지으면 능히 간결하고 옛 고전에 젖었으니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힘쓰지 않음은 근심할 것이로되 늦게 배우는 것은 근심할게 아닌 것이니 어찌 인(印) 아무개를 보지 못하느냐?”라고 하였다. 그의 부친께서 몹시 엄하셔서 뜻을 받들기가 어려웠으나 조금도 거스름이 없었고 불행히도 봉양을 모두 끝마치지 못하고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임종(臨終)때 유언이 모두 처량하여 가히 들을 수가 없었으니 때는 무신년 九월이었다. 복흥승적산(福興勝敵山) 남쪽 기슭 오좌에 장례를 모시었다. 배위는 안동권씨이시니 아비는 성의(聖義)요 계배(繼配)는 강릉유씨(江陵劉氏)로 一男一女를 두었으니 아들 치확(致矱)은 장택고씨(長澤高氏)에 장가드니 참봉 제강(濟江)의 손녀요 딸은 안동권씨 준명(俊命)에게 시집갔다. 손자 재권(在權)이니 즉 남원양씨(南原梁氏) 억영(億泳)의 사위가 되었다. 치확(致矱)이가 능히 효성스러워서 나에게 보이고 눈물을 지으면서 묘비명을 청하매 진실로 사양하기가 어려웠다. 명(銘)하여 이르노니 “빛나는 성현께서 훈계하시기를 七十에야 깨닫는다고 하였도다. 발 뒷굽을 세움에 이르러서는 箚住克固할 지어다. 오히려 四十이 다 되어서 玉石을 일러 쳐서 다듬었구려. 선대의 아름다움을 계술(계승)하였으니 척봉(尺封:조그만 봉분)에 빛나리로다.” 崇禎甲申後二百九十年夏 五月重午 密平 朴寅述 撰